[미디어] 이제는 생산자 운동이다
Journalist : 창조 | Date : 03/02/13 3:09 | view : 371415     
 

자본주의 사회에서 승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이다.


어느 누구도 아닌 공룡 한 마리,..





정보화 사회, 문화 콘텐츠 시대를 살면서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많은 부작용과 사건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그 까닭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죄악된 존재성에 있다.


예컨데, TV 프로그램이 저급해지고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자율 속에 숨어있는


부패하고 저급한 속성 때문이다.





예컨데, 음란성 시비의 비디오가 있다면


인간의 자발성이 음란성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인간 자신이 이러한 속성을


스스로 부채질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자본주의가 한 자리하고 있다.





얼마전, 인사동 한 갤러리에서


몸에 바르는 유제품과 관련된 퍼포먼스가 있었다.


'누드'였다.





예술성, 음란성 시비가 이어졌다.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이 시비는 예견된 것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퍼포먼스 이후에 벌어진 양상까지


기획된 것이었다.





시비의 초점은 상업성의 개입여부이다.


누가 보더라도 시제품 출시와 관련된 광고 퍼포먼스였지만,


그것은 '가능한 추정'일 뿐, '그렇다'는 '고백'은 없다.





많은 시민단체에서 시청자 모니터 등


미디어 문화 소비자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운동의 한계는


'가능한 추정' 안에서 '애매한 윤리'를 법적으로 붙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의 동인은


자본주의 시장의 특성이 만들어낸 바이러스 효과이다.


즉, 돈을 벌기 위해서 인간의 취약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좋은 일 한다', '의미 있는 일이다'는 표현 뒤에


'돈이 되겠어?', '그럼, 수익은 있나?'는 식으로


가치절하의 뒤끝을 흐리고 만다.





'자본주의 시장성'이라는 공룡은


닥치는대로 잡아 먹는다.


아니면, 짚밟던가. 둘 중의 하나다.





소비자 운동은 필요한 운동이면서


'대안'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한 취약성이 있다.


건전한 비판은 가능하지만,


그래서, 더 나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이것도 어렵지만)


필요한 것을 생산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생산자 운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성'이라는 마당에서


생산자 운동은 불가능하다.





예컨데, 질 좋은 영화나, 비디오 영상물을 만들어서


배포 판매하려 한다면, 경제성이 충족되지 못하여


운영조차 어려워 오래가지 못하고 중단될 것이다.





생산자 운동은 '판매'라는 담론 밖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함께 만들고, 함께 나누는 것이다.


즉, 이제는 '소비'가 아니라, '누리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시장성이 만들어내고 있는


질적인 수준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시장성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것을 만들 수 있다.





미디어의 활용과 생산 그리고, 나눔을 위한 콘텐츠 인프라가


미디어 생산의 대중화를 가능케 할 정도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생산자 운동'를 시작할 때인 것이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했던가!


좋은 만남, 좋은 누림이


나쁜 만남, 나쁜 소비로부터 보호할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음란성 시비와 같은 수용자 중심 운동이


상술에 역 이용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미디어라는 좋은 도구를 가장 이롭고 가치 있게 사용해서


가장 가치 있는 누림과 미디어 환경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수용자 중심의 소비자 운동이 구분짓는 활동이라면,


미디어 생산자 운동은 공동체를 살지게 하고 강화하는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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